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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특히, 이런 류의 아카데믹한 책들을 잘 읽지 못하고,
계속 이 책 저 책 돌려가며, 펼쳤다 덮었다는 반복하는 모습을 보면서,
상당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독해력의 상실인건가, 지적인 활동력의 퇴화인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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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바울 서신의 기저에 깔려있는 "인간관"을
2000년의 간극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독해해야
그의 메시지를 올바르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지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을 읽으면서,
중간에 상당한 뻑뻑함을 몇 번 느끼긴 했지만,
포기하지 말자고 생각하면서
꾹 참고 끝까지 달려봤다.
다양한 전제가 깔리고, 긴 호흡으로 논변이 정교하게 펼쳐져서
결국 결론에 다다르는 이런 류의 학문서들도
좀 더 신경써서 자주 펼쳐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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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서신에 등장하는 바울의 언어는 매우 독특하다.
현대인들이라면
"나는 예수와 함께 산다." "예수가 나와 함께 있다"라고 표현해야 할 문장들을
"나는 예수 안에 살고, 예수는 나의 안에 산다" 라고 표현하니 말이다.
즉, 현대 영어에서 A is with B 혹은 A is beside B 라고 표현되어야 할 문장을
명백히 바울은 "A is in B"라는 표현으로 풀어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와 유사한 표현들을 바울 서신에서
예수와 구원을 논하는 부분에서 끊임 없이 반복되어 사용된다.
"나는 죽었고, 내 안에 사는 것은 그리스도다"
"나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내가 원치 않는 일는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살고 있는 죄이다"
라는 표현 등이 대표적이 예이다.
현대인의 언어로 이해하기 힘든 용법의 이런 기묘한 표현법을 동원한 문장들이
바울 서신에서 너무도 중요한 논리 전개를 위한 핵심 문장에 빈번히 등장하는 이유는
그가 전제하고 있는 "인간관"이 현대적 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 책의 설명이다.
즉,
데카르트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세상과 분리되어 있고, 독립적인 정체성을 소유한 개별자로서의 "개인"이라는 개념은
근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탄생된 매우 근대적인 개념인데,
그보다 1500년 이전의 문헌에 이런 근대적 개념을 적용하여 읽는 것은
아주 전형적인 아나크로니즘에 해당하며,
따라서 그 문헌에 대한 바른 독해를 저해하는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를 펼치기 위해서 저자는
바울과 거의 동시대의 대표적 스토아 철학자인 에픽테투스의 문헌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또 현대의 심리학/뇌인지과학 등 제 학문의 내용들을 참조하며,
그에 덧붙여, 불트만과 케제만의 바울 신학을 주요한 참조점으로 설정하여,
그런 것들과의 대조를 통해서
'바울의 독특한 인간관'을 선명하게 부각시켜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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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칭적 해석"이나 "3인칭적 이해"가 아니라
"2인칭적 정체성"의 수용과 그것에 기반한 성서 독해를 제안하는 저자는,
그런 관계 중심적이고, 참여적인 자아관의 정립을 통해서
바울의 신학을 옳게 이해함과 동시에
그의 신학에 대한 "현대적인 재해석과 적용"이 가능하게 된다고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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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현대의 기독교가 왜 이런 모습인지,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어서,
"싸구려 값싼 복음과 열매 맺지 못하는 공동체"가 탄생되는지에 대한
매우 의미있는 인싸이트를 얻을 수 있었다는 점이
개인적으로 큰 소득이고,
스토아 철학에 대한 저자의 자세한 설명을 통해서
헬라적 세계관에 대해서 좀 더 배울 수 있고,
따라서, 신약 성서의 독해에 있어서
의미있는 렌즈를 얻을 수 있었다는 점 또한
가치있는 수확이다.
바울 서신을 어떻게 읽는 것이 바람직한지에 대한
수준 높은 조언을 해준다는 점은
저자가 이 책을 쓴 기본적인 목적이니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는 이 책의 기여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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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신학을 논하는 책에서
그의 "종말적 긴급성"이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는 점은
이 책의 결정적 한계라고 하겠으나,
저자가 언급하였듯이,
이 책은 어떤 정답을 제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답을 찾아가는 출발점을 제안하는 목적으로 쓰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다양한 주제를 모두 엮어 종합적으로 다루는 것은
좋은 방향성은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