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한반도의 개신교인들에게 "삼위일체"는 사실 사문화되서 명제로만 존재하는 교리일 뿐, 그들의 신앙생활과 긴밀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 목사들의 입에는 담기고, 멋진 글로는 존재하되, 그 생명력은 이미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 체계는 살아 움직이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신앙고백"이라기 보다는, 천오백년 전 로마제국의 사람들이 그들의 환경에서 나름 당면해야 했던 정치적인 헤게모니 쟁탈전의 결과물에 진하지 않는다. 이것이 삼위일체에 대한 솔직한 평가다. 멀고도 먼 딴 세상 이야기.
@ 당장 예배당에 가서 그곳에 앉아 있는 교인들에게 삼위일체와 관련된 다양한 논점들에 대해서 질문해 본다면 돌아오는 반응은 그저 '모르겠다는' 수줍은 웃음 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양태론적 설명이나 단성론적 설명 혹은 가현론적인 설명을 제시하고 옳은가 그른가를 물어봐도 돌아오는 반응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간다, 예수를 믿으면 부자가 된다, 예수를 믿어야 자식이 성공한다는 류의 믿음이, 이 시대의 개신교인들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도그마일 것이고, 주일성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십일조 생활을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더 의미있는 신학적(?) 질문일 것이다.
@ 이미 죽어버린 고백이 되어버렸다는 점과는 별개로, 삼위일체는 "유일신교"임을 내세우는 아브라함계 종교에서는 결코 쉽지 않은 숙제를 던져주는 교리이기도 하다.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에 대한 흔들릴 수 없는 믿음이 과연 "삼위일체"라는 설명체계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난해하기도 하고 난감하기도 하다. 게다가, 삼위일체에 대해서 사실상 그 누구도 깔끔하고 단순하게 설명하는 사람은 없고, 결국에는 그 설명이 "그냥 믿으라"라는 식의 결말을 보인다는 점은, 이 죽어버린 교리의 본질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무슬림들이 기독교를 비웃으며 "너희들은 유일신교가 아니라 다신교야"라고 놀릴 때에, 그것을 터무니 없는 모략으로 보기 보다는, 현실을 정확히 파악한 "팩폭"이라고 보는 것이 더 무리가 없다.
@ 삼위일체 교리는 과연 어떻게 생겨났고, 왜 생겨났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가장 간편한 답은 "교리사"적인 접근을 통해서 주어질 수 있다. 몇 년도 어디에서 어떤 종교회의가 있었고, 어떤 종교회의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서 어떤 내용이 가결되어, 교리로 선포되었는지에 대한 교리사적인 설명 말이다. 하지만, 교리사적인 접근 이외의 접근법을 통해서도 삼위일체에 대한 연구는 행해진다. 그 대표적인 접근법이 바로 "성서신학"적인 접근이다.

@ 삼위일체 교리가 어쩌다가 등장하게 되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가장 흔한 4가지의 대답이 있다.
* 역사적 예수와의 충격적인 만남을 통해서 1세대 제자들은 삼위일체의 인식에 다다르게 되었다.
* 헬라 철학의 영향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에 삼위일체적인 설명체계가 유입되었다.
* 제2성전기 유대교 신앙이 이미 삼위일체라는 싹을 배태하고 있었다.
* 당시 팔레스타인 및 지중해 지역에 만연한 성서주해의 특정 방향이 삼위일체를 유도해내었다.
@ 한 시대를 풍미했던 다양한 대가들이 각각의 명제들을 깊이 있게 연구했고, 특히 제2성전기 유대교와의 관련성에 대한 연구가 최근에 상당히 뜨겁게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반면, 이 책의 저자가 주목하고 있는 점은 4번째 명제이다. 학문적 주류라기 보다는 변방에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법한 그의 이론에 따르면, 기독교 교회가 500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려 결국 "삼위일체"라는 결론을 만들어내게 된 가장 큰 원동력은 그들의 독특한 성경 주해 방식에 있다는 것.
@ 그 독특한 주해법을 그는 prosopological exegesis (이하 PE)라고 명명하고 있는데, 성경 텍스트의 다양한 부분에 각각 다양한 "화자"를 다소 인위적이지만 의미있게 할당하고, 그런 정밀한 "화자 할당"을 통해서 텍스트에 숨어 있는 의미를 발견할수 있다는 것이 그 요체이다. 그에 따르면, 이런 PE는 초대교회의 구성원들 뿐만 아니라, 제2성전기 유대교의 다양한 지평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주해법이고, 당시의 기준으로는 "당연하고도 합당한" 텍스트 독해법이다. 뿐만 아니라 로마시대의 비종교적인 텍스트와 공연예술의 영역에서도 이런 식의 "읽기"는 당연한 전범이다. 즉, PE는 독특한 글읽기가 아니라 평범한 글읽기 기법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 사실, 신약 성서 텍스트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구약성서 주해의 예들은 그의 논지를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 구약 성서를 읽는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이런 독해법을 이용해서 그 참된 의미를 발견하려고 노력했다. 저자는 이 저서에서, 성경과 기독교 문서 이외에도, 다양하고 폭넓은 문서적 사료를 그 근거로 제시하면서, PE의 보편성을 학문적으로 논증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PE적인 스탠스로 성경 텍스트에 접근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PE가 없었다면,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태초부터 존재했고, 천지창조에 관여했고,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서로 교통하며 전 우주를 통치하고 있다는 확신에 도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자신의 논지를 명확하고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설명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일단 합격. 물론, 허접한 서술 수준과 말도 안 되는 내용 전개의 글이라면, Oxford Press에서 출판을 하지도 않았겠지.
@ 물론, 이 책을 덮으면서 우리가 반드시 던져야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과연, PE적인 구약성서 읽기는 우리에게 의미있는 독해법인가? 그리고, 초기 기독교인들이 PE적 태도로 구약성경을 읽은 것은 바람직한 성경 읽기였는가? 내 시각에서 보자면, PE란 것은 일정수준의 글읽기에 실패한 초기 기독교인들의 "구약 텍스트 오독" 혹은 "구약 텍스트 초월 번역"을 학문적으로 변명해주는 개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요즘의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쉽게 성경을 읽을 수 있는 환경에 있으면서도 왜 삼위일체는 점점 죽은 교리가 되어가고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매우 간단하다. 정상적인 구약읽기를 통해서는 "삼위일체"라는 내용을 읽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 부분이 이 책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약점.
@ 정확히 말하자면, 초기 기독교인들이 PE적인 글읽기를 통해서 삼위일체 교리에 접근했다는 표현은 선후가 뒤집혀 있다. 그들이 PE를 통해서 삼위일체에 도달했다기 보다는, 삼위일체라는 결론을 강력하게 염두에 둔 상태로, 텍스트를 꼼꼼하게 읽어서 그들이 원하는 문구와 표현을 텍스트의 맥락과 분리하여 추수해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애초에 삼위일체의 내용이 담겨있기 않은 텍스트에서 삼위일체를 논증하는 텍스트를 찾아내어 제시해야 하기에, 인위적인 화자의 할당이 필요했고, 그런게 발견된 "근거"들은 내러티브 단위로 존재할 수가 없고, phrase의 단위로만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논의들은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설득력 있는 논변으로 느껴지지 않고 "말장난"으로 느껴지게 된다. 이런 점은 초기 기독교의 기독론의 정립 과정에서도 정확히 그리고 선명하게 발견된다. 뿐만 아니라, 현대의 기독교인들이 히브리서를 읽으면서 느끼는 낯선 느낌, 따라가기 힘든 내용 전개는 이럼 점을 정확히 보여준다 하겠다.
@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접근법을 꽤나 깔끔하게 배울 수 있다. 그것에 수긍할 수도 없고, 동의할 수도 없지만, 그들이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있다. 이 책이 주는 큰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