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칭찬은 아이의 발달에 도움을 주는가, 악영향을 주는가?

최근 벌어지는 아이들의 수면 부족은 어떤 결과를 야기하고 있는가?

왜 그리고 어떻게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는가?

영유아기에 이뤄지는 "영재판별"은 의미있는가?

형제/자매는 개인의 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십대의 반항'에 대해서 과학은 어떤 설명을 던져주는가?

자기통제는 학습될 수 있는가?

"놀이"는 성장과 발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언어 습득'의 결정적 요소들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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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다양한 질문들에 대해서

과학적이고 통제된 실험 데이타를 동원해서

객관적인 설명을 제공해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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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한국인들에게 

45년부터 50년까지의 기간은 백지 상태의 답안지와 같다. 

아는 것이 없으니, 쓸 것도 없다. 


근대사에 대한 제대로된 교육이 공교육의 영역에서 실질적으로 거의 존재하지 않고,

여러가지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근대사에 대한 사회적 담론 자체가 거의 죽은 상태에 있는 현 상황은

근대사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얇디 얇게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그 깜깜하다는 근대사 중에서도,

식민지 시대가 끝난 해방공간의 한반도는 

여전히 많은 한국인들에게 가장 깜깜한 미답지 중 미답지라 할 수 있는 낯선 영역이다. 

해방부터 한국전쟁의 발발에 해당하는 기간은 담론 자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 혼란의 시대가 한국사회의 모순을 가장 확실하게 잉태하고 출산했기 때문에,

그 기간은 우리에겐 "금기"와 같은 영역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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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에 일본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2차대전이 실질적으로 종결되었을 때,

그 충격적인 "패전"을 식민지에서 맞이한 사람들,

즉, 한반도를 "고향"이요 터전이라고 여기며 살고 있었던 약 100만의 일본인들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그들은 어떻게 일본으로 돌아갔으며, 그 과정에서 어떤 일들을 겪었을까?

그리고, 그 혼란의 와중에 조선 사람들에게는 어떤 일들이 벌이지고 있었을까?


이 책은 위의 질문에 대한 "삽화적인 대답"을 제공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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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기를 생각하면 언제나 "적산 불하"와 "좌우갈등" 이외엔

딱히 다른 것을 생각지 못하는 나에게

이 책은 전혀 다른 관점으로 그 시기를 보자고 제안하고 있다. 

흥미진진한 분야다. 


지난 번에 읽은 전후의 일본사회와 GHQ에 대한 책과 더해지면,

지금의 일본인들이 한국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묘한 감정을 

훨씬 더 잘 이해하는 단초도 된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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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성전기 유대교의 문헌과 초기 기독교 문헌들에 나타난

'메시아 사상'을 정리해 놓은 책이다. 


엔니지어였다가 랍비가 된 

히스패닉계의 이름을 가진 학자의 책이라 

시작하기 전엔 좀 궁금함이 있었는데,

그렇게 좋은 퀄리티의 책은 아니다. 


내용도 

단순히 1차적인 자료의 나열에 그치고 있을 뿐더러,

책의 기본적인 편집과 교정이 깔끔하지 못하다. 


분열과 열병의 수준으로 

군대의 전반적인 수준을 가늠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입장에서 보자면,

이 책은 기본적인 군기조차 잡혀 있는 않은 "당나라 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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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서서히 막바지를 향해서 달리고 있는 시점에

사실 별 기대 없이 시작한 이 책은

아마 올해의 독서 생활을 총결산 해 본다면

"의미있는 책, 세 권"안에 분명히 들어갈 것같다. 


어마어마한 퀄리티의 문장들이 책 한 권을 꽉꽉 채우고 있기에,

이 책과 성경을 함께 펼쳐 놓고, 두 텍스트를 오가며 글을 읽는 재미.

성경 공부의 꿀잼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

아브라함, 요셉, 모세, 다윗 등 우리에게 친숙한 인물이 아니라,

"신(엘로힘/야훼)"이라는 캐릭터의 탄생과 성장/발전을 중심으로 해서 

전체 39권의 흐름을 훑고 있는 이 책은

"구약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매우 훌륭한 "큰 그림"을 보여준다. 


성서신학의 비교적 최근의 연구결과들을 무시하지 않고 꼼꼼히 잘 반영하면서도,

"신학"적 접근이 아니라 철저히 "문학"적 접근을 통해서 구약 텍스트를 설명한다. 


@

신학적 지식이 없이도, 꽤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은 큰 장점인데,

단, 성경 통독의 횟수가 적거나 없어서 성경에 대한 배경 지식이 얕은 경우에는

'유레카!'스러운 재미를 느끼기는 쉽지 않다. 


다시 말해서, 신학적 지식이 많이는 필요하지 않지만,

성경에 대한 기본 지식은 많이 요구하는 책이다.


이런 책은 본질적으로

기존에 가지고 있던 시각을 비틀어서 

새로운 조명과 새로운 렌즈로 

성경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경험하게 해주는 것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

그의 설명에 따르면 구약 성경의 신은

"전능"하지만 "무지"한 캐릭터에서, "무능"하지만 "전지"한 캐릭터로 발전한다.


뭘모르고 나대는 캐릭터가 

성장과 발전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고

똑똑하고 신중하여 한 발 떨어지는 캐릭커가 된다는 말씀.

말하자면, 구약성경은 엘/야훼의 성장소설인 셈이라고나 할까...


수다스럽고 오지랖 쩔게 사사건건 간섭하고 개입하던 신은 

구약의 후반부로 갈수록 조용하고 한 걸음 떨어진, 극도의 신중한 캐릭터가 된다. 


급기야 

구약성경의 마무리 부분인

욥기를 거쳐서 에스라-느헤미야-에스더로 가면서 

신은 "침묵"과 "부존재"의 수준으로까지 진화하게 된다. 


저자가 명시적으로 쓰지는 않았지만

그런 신 캐릭터의 다양성과 변화는 

기실 "인간의 신 인식" 변화를 반영한다는 점이 행간에서 강력하게 읽힌다. 

매우 의미있는 insight다. 


@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욥기에 대한 설명이다. 

저자는 욥기의 후반부에 나타나는 욥과 신과의 대화를 제시하면서,

욥의 태도를 "시니컬함"으로 설명한다. 


즉, 욥은 신의 태도과 반응을 보면서

대화의 가능성을 내려놓고

"전능함/전지함"을 내세우는 신을 향해서 "시니컬한 동의"로 대화를 종결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이러한 설명은 

신명기적 사관과 확연히 대비되는

제2성전기 유대교 특유의 정서를 잘 이해하는

키 포인트가 된다. 


@ Self-Help류의 책이 "유익하다" 혹은 "읽길 잘했다"라는 느낌을 주는 확률이 높지 않다. 담고있는 지식의 밀도도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mass market을 지향하다 보니, 아무래도 깊이있는 뭔가를 제공해주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self-help류의 책들이 모두 종이 낭비요 쓰레기인가 묻는다면, 당연히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 있다. 간간이 발견되는 유익한 책들이, 가끔 그런 책들을 펼치게 만들어준다. 


@ 이혼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이 책은, 긴 세월의 검증을 받으며 여러 개정 증보판(1982, 1992, 2014)이 출간되었다는 사실에서 엿볼 수 있듯이, 꽤나 유익한 내용들이 알차게 박혀 있는 튼실한 포도송이다. [Crisis -> Crazy Time -> Recovery]의 순서로 진행되는 이혼의 과정을 조목조목 자세히 들여다 보면서, 각 단계에 처한 이혼 당사자들이 어떤 심리상태에 처하게 되는지, 어떤 점을 주의해야 하는지 등을 담담하게 잘 서술하고 있다. 물론, 이혼에 대한 책이니 만큼, 어떤 이유 때문에 부부가 서로 파탄에 이르게 되고, 어떤 문제가 후일 큰 분열을 야기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당연히 넘쳐난다. 


@ 저자가 설명하는 Dominant/Submissive 개념, Deadlock 개념, Public Divorce 개념은 부부관계 그리고 이혼의 역학관계를 이해하는 데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런 렌즈를 통해서 가정을 살펴보는 자세는 우리 모두가 익혀야할 스킬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혼 뿐만 아니라, 연애와 가정생활과 다양한 인간관계에 두루 적용될 수 있는 insight가 있다. 

​@ 2019년 한반도의 개신교인들에게 "삼위일체"는 사실 사문화되서 명제로만 존재하는 교리일 뿐, 그들의 신앙생활과 긴밀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 목사들의 입에는 담기고, 멋진 글로는 존재하되, 그 생명력은 이미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 체계는 살아 움직이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신앙고백"이라기 보다는, 천오백년 전 로마제국의 사람들이 그들의 환경에서 나름 당면해야 했던 정치적인 헤게모니 쟁탈전의 결과물에 진하지 않는다. 이것이 삼위일체에 대한 솔직한 평가다. 멀고도 먼 딴 세상 이야기. 


@ 당장 예배당에 가서 그곳에 앉아 있는 교인들에게 삼위일체와 관련된 다양한 논점들에 대해서 질문해 본다면 돌아오는 반응은 그저 '모르겠다는' 수줍은 웃음 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양태론적 설명이나 단성론적 설명 혹은 가현론적인 설명을 제시하고 옳은가 그른가를 물어봐도 돌아오는 반응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간다, 예수를 믿으면 부자가 된다, 예수를 믿어야 자식이 성공한다는 류의 믿음이, 이 시대의 개신교인들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도그마일 것이고, 주일성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십일조 생활을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더 의미있는 신학적(?) 질문일 것이다. 


@ 이미 죽어버린 고백이 되어버렸다는 점과는 별개로, 삼위일체는 "유일신교"임을 내세우는 아브라함계 종교에서는 결코 쉽지 않은 숙제를 던져주는 교리이기도 하다.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에 대한 흔들릴 수 없는 믿음이 과연 "삼위일체"라는 설명체계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난해하기도 하고 난감하기도 하다. 게다가, 삼위일체에 대해서 사실상 그 누구도 깔끔하고 단순하게 설명하는 사람은 없고, 결국에는 그 설명이 "그냥 믿으라"라는 식의 결말을 보인다는 점은, 이 죽어버린 교리의 본질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무슬림들이 기독교를 비웃으며 "너희들은 유일신교가 아니라 다신교야"라고 놀릴 때에, 그것을 터무니 없는 모략으로 보기 보다는, 현실을 정확히 파악한 "팩폭"이라고 보는 것이 더 무리가 없다. 


@ 삼위일체 교리는 과연 어떻게 생겨났고, 왜 생겨났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가장 간편한 답은 "교리사"적인 접근을 통해서 주어질 수 있다. 몇 년도 어디에서 어떤 종교회의가 있었고, 어떤 종교회의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서 어떤 내용이 가결되어, 교리로 선포되었는지에 대한 교리사적인 설명 말이다. 하지만, 교리사적인 접근 이외의 접근법을 통해서도 삼위일체에 대한 연구는 행해진다. 그 대표적인 접근법이 바로 "성서신학"적인 접근이다. 




@ 삼위일체 교리가 어쩌다가 등장하게 되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가장 흔한 4가지의 대답이 있다. 


* 역사적 예수와의 충격적인 만남을 통해서 1세대 제자들은 삼위일체의 인식에 다다르게 되었다.

* 헬라 철학의 영향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에 삼위일체적인 설명체계가 유입되었다. 

* 제2성전기 유대교 신앙이 이미 삼위일체라는 싹을 배태하고 있었다.

* 당시 팔레스타인 및 지중해 지역에 만연한 성서주해의 특정 방향이 삼위일체를 유도해내었다. 


@ 한 시대를 풍미했던 다양한 대가들이 각각의 명제들을 깊이 있게 연구했고, 특히 제2성전기 유대교와의 관련성에 대한 연구가 최근에 상당히 뜨겁게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반면, 이 책의 저자가 주목하고 있는 점은 4번째 명제이다. 학문적 주류라기 보다는 변방에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법한 그의 이론에 따르면, 기독교 교회가 500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려 결국 "삼위일체"라는 결론을 만들어내게 된 가장 큰 원동력은 그들의 독특한 성경 주해 방식에 있다는 것.


@ 그 독특한 주해법을 그는 prosopological exegesis (이하 PE)라고 명명하고 있는데, 성경 텍스트의 다양한 부분에 각각 다양한 "화자"를 다소 인위적이지만 의미있게 할당하고, 그런 정밀한 "화자 할당"을 통해서 텍스트에 숨어 있는 의미를 발견할수 있다는 것이 그 요체이다. 그에 따르면, 이런 PE는 초대교회의 구성원들 뿐만 아니라, 제2성전기 유대교의 다양한 지평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주해법이고, 당시의 기준으로는 "당연하고도 합당한" 텍스트 독해법이다. 뿐만 아니라 로마시대의 비종교적인 텍스트와 공연예술의 영역에서도 이런 식의 "읽기"는 당연한 전범이다. 즉, PE는 독특한 글읽기가 아니라 평범한 글읽기 기법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 사실, 신약 성서 텍스트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구약성서 주해의 예들은 그의 논지를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 구약 성서를 읽는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이런 독해법을 이용해서 그 참된 의미를 발견하려고 노력했다. 저자는 이 저서에서, 성경과 기독교 문서 이외에도, 다양하고 폭넓은 문서적 사료를 그 근거로 제시하면서, PE의 보편성을 학문적으로 논증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PE적인 스탠스로 성경 텍스트에 접근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PE가 없었다면,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태초부터 존재했고, 천지창조에 관여했고,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서로 교통하며 전 우주를 통치하고 있다는 확신에 도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자신의 논지를 명확하고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설명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일단 합격. 물론, 허접한 서술 수준과 말도 안 되는 내용 전개의 글이라면, Oxford Press에서 출판을 하지도 않았겠지. 


@ 물론, 이 책을 덮으면서 우리가 반드시 던져야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과연, PE적인 구약성서 읽기는 우리에게 의미있는 독해법인가? 그리고, 초기 기독교인들이 PE적 태도로 구약성경을 읽은 것은 바람직한 성경 읽기였는가? 내 시각에서 보자면, PE란 것은 일정수준의 글읽기에 실패한 초기 기독교인들의 "구약 텍스트 오독" 혹은 "구약 텍스트 초월 번역"을 학문적으로 변명해주는 개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요즘의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쉽게 성경을 읽을 수 있는 환경에 있으면서도 왜 삼위일체는 점점 죽은 교리가 되어가고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매우 간단하다. 정상적인 구약읽기를 통해서는 "삼위일체"라는 내용을 읽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 부분이 이 책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약점.


@ 정확히 말하자면, 초기 기독교인들이 PE적인 글읽기를 통해서 삼위일체 교리에 접근했다는 표현은 선후가 뒤집혀 있다. 그들이 PE를 통해서 삼위일체에 도달했다기 보다는, 삼위일체라는 결론을 강력하게 염두에 둔 상태로, 텍스트를 꼼꼼하게 읽어서 그들이 원하는 문구와 표현을 텍스트의 맥락과 분리하여 추수해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애초에 삼위일체의 내용이 담겨있기 않은 텍스트에서 삼위일체를 논증하는 텍스트를 찾아내어 제시해야 하기에, 인위적인 화자의 할당이 필요했고, 그런게 발견된 "근거"들은 내러티브 단위로 존재할 수가 없고, phrase의 단위로만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논의들은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설득력 있는 논변으로 느껴지지 않고 "말장난"으로 느껴지게 된다. 이런 점은 초기 기독교의 기독론의 정립 과정에서도 정확히 그리고 선명하게 발견된다. 뿐만 아니라, 현대의 기독교인들이 히브리서를 읽으면서 느끼는 낯선 느낌, 따라가기 힘든 내용 전개는 이럼 점을 정확히 보여준다 하겠다. 


@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접근법을 꽤나 깔끔하게 배울 수 있다. 그것에 수긍할 수도 없고, 동의할 수도 없지만, 그들이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있다. 이 책이 주는 큰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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