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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의 성격을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지

복음서를 우리가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성공회 신학자인 Bauckham이 쓴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책.

 

"양식비평" 및 다양한 주류 자유주의 신약학자들이 보여주고 있는

복음서에 대한 "의심"의 방향성을 인정하지 않고

네 복음서 텍스트가 역사적 예수의 진실한 모습을 

충분히 담아내고 있다고 주장하는 책이다. 

 

쉽게 말해서, 친교회적 보수주의 기독교의 색체를

최대한 현대적인 신학계에서 통하는 언어로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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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두고,

신약신학계의 "패러다임 전환"이라고 

극찬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이 책이 내용에 동의하는지 동의하지 않는지의 여부와는 무관하게,

이 책이 꽤나 잘 씌여진 책이라는 점은 확실히 알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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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가

"직접 목격자"의 생생한 증언을 바탕으로 씌여졌으며,

심지어 한 복음서는

"직접 목격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하는 것을 뛰어넘어,

아예 그 "직접 목격자"가 썼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요지다.

 

그 가장 생생한 복음서가 '요한복음'이라는 점이 

함정이라면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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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메인스트림의 신약신학이 가르치는 것,

즉, 예수의 사역과 복음서의 기록 사이에는 꽤나 긴 시간적이 간격이 존재할 뿐만아 아니라,

그 구전 전승의 과정도 수많은 재전달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복음서의 내용이 "역사적 예수"에 대한 정보를 담아내기엔 부적절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책의 저자 Bauckham의 주장은 그간 기죽어 있는 보수적 신학계가 두 팔을 벌려 환영할 만하다. 

 

게다가, 대부분의 신약학자들이 "역사적 사료로서의 신뢰성"이라는 측면에서는 F학점을 주고 있는

요한복음을 가장 신뢰성이 높은 직접 목격자의 생생한 증언으로 격상시키는 

이 책의 14~17장을 읽노라면,

저자가 일부러 어그로를 끄는 것인가 라는 생각까지도 하게 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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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인 18장에서는

예수에 대한 증언을 "유대인 홀로코스트"의 여러 증언들과 비교하며,

"직접 목격자의 증언"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어... 이거 약간 선을 넘는데..." 라는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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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학문 영역의 폭넓은 근거들을 두루두루 동원해서

복음서의 역사적 유의미성을 설명하는 1장에서 13장까지의 글은

자신의 주장을 충분한 논거를 동원해서 탄탄하게 뒷받침하는

잘 씌여진 글을 읽는 재미를 충분히 선사한다. 

 

복음서가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예수"와의 넘을 수없는 간극을 

분명히 보여주는 텍스트가 아니라,

그 둘이 굳이 구분될 필요가 없다는 점을 깔끔하게 보여주는 증거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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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들고 다시 읽는,

원숭이 부처되는 기똥찬 이야기"라는 작은 제목이

그야말로 기똥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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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태용 교수는

우리 모두가 한 번쯤은 읽어본 서유기를

그 참 의미가 생략되지 않고 잘 전달될 수 있도록

차근차근 풀어서 설명해준다. 

 

서유기에 대한 그의 재미난 이야기를 

한걸음 한걸음 따라가다보면,

불교적인 메타포로 가득차 있는 서유기의 참 맛에

점점 더 접근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

엄청난 내공을 지닌 자만이

가볍고 재미나게 얘기를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겠다. 

 

굉장한 책이다. 

형섭이 형도 참여한 바 있는 홍상훈 교수의 서유기 완벽본을

언젠간 읽어야겠다는 다짐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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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사용된 무기와

각종 도구들의 발전을 통해서 간추려본

세계의 전쟁사. 

 

"세계"라는 표현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할 사람들도 있겠으니,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서양 전쟁사"라고도...

 

@

기술과 전쟁이라는 키워드가 결합되어 있으니,

어지간 해서 재미 없기 힘든 방향이기도 하다. 

 

무기들의 경합과 발전

그리고 그에 따른 전쟁 양상의 변화도 재미있고,

전쟁의 이면에 도도히 흐르는 서양의 역사도

흥미롭다. 

 

@

기술의 발달이 전쟁이라는 현상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발전해가는지를

굉장히 잘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지나치게 디테일하지도 않고,

필요 이상으로 압축 요약되어 있지도 않은

그 "적절함"을 달성하기 위한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완벽히 성공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저자가 심혈을 기울여서 주목하고 있는 파트는 

1800년대 중반에서 양차 대전의 종료까지, 대략 100여년에 이르는 시기인데,

이 시기에 이루어진 "폭발적인 기술적 혁신"은

그 전 시기에 인류의 문명이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속도의 혁신을 선보임으로써,

그것은 결국 "전쟁"이라는 행위를 전혀 새로운 차원의 상황에 놓이게 만들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

개인적으로 관심있게 읽은 부분은

"과거"의 전쟁역사가 아니라

저자가 "미래의 전쟁"을 어떻게 전망하는가 라는 부분이었다. 

 

"핵무기"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의미있는 통찰로 가득하고,

비정규적인 전쟁의 가능성과 테러리즘의 특성에 대한 설명도 의미있다. 

 

전체적으로, 미래의 전쟁에 대한 저자의 철학적 고찰도 상당히 선견자적인 방향성이 돋보인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그리고 9/11테러가 세상을 완전히 바꾸어놓기 이전,

그러니까, 1991년도에 출판된 책이니 만큼,

이런 변화들을 족집게처럼 딱딱 짚어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전쟁이 지니고 있을 숙명적인 특성들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독서의 속도를 늦추어서 천천히 생각을 덧붙여가며 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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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을 다루고 있는 책이지만,

저자는 책 전체에서 끊임 없이 정반대의 메시지를 던져준다. 

 

'기술'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고, 전쟁의 양상을 규정한다는 생각,

그리고 무기가 전쟁의 결정요소라는 생각에 

우리가 흔히 빠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측면과

지극히 비합리적/감정적이고 의례적인 특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이 모순적인 "전쟁"이라는 행위는

비기술적/비물질적인 요소 또한 크게 지배하는 독특한 영역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저자가 Reza Aslan이라면,

책의 퀄리티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도 없지만,

페이지 넘어가는 재미에 대해서도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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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발생과 성장 과정을

인류 문명의 시작전의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큰 틀을 놓치지 않게 잘 훑고 있다. 

 

전공자들에게는

상식과 다름 없는 단순한 내용들이지만,

일반인들에게 "종교"와 "신 관념"의 발전에 대해서

이정도로 쉽고 재미나게 잘 쓰여진 책이 또 있겠는가!

 

본인이 충분히 소화했을 때에,

남들에게 쉬운 가르침이 가능하다.

 

신관념이 어떻게 탄생하는지,

그리고 그런 신관념이 어떻게 진화/발전하는지를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아울러, 인격신의 등장과 유일신교의 성립에 이르는 부분도

잘 설명되어 있고,

유일신교의 성립 이후의 

여러 종교의 분화과정도 명확하게 제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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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피즘, 선불교, 카발라에 대한

깊은 고찰이 담긴 책을 좀 더 읽고 싶은 마음을

잘 자극하는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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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본인이 겪은 영적인 여정의 순서대로 써여져 있는 이 책이

최종적으로 말해주고자 하는 바는 pantheism적으로 "너가 바로 신"이라는 것!

 

물론, 이런 결론에 동의하지 못하는 다양한 종교의 신앙인들이라 할지라도,

인간이 역사를 통해 겪어온 "신 관념"의 발전 단계를 배우고 익히는 것은

자신의 신앙을 더욱 더 풍부하고 윤택하게 하는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해본다. 

 

활동 중 납치된 NGO 활동가가 겪은

몇 달 동안의 감금 그리고 탈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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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폭력적이고 살벌한 납치와 감금

혹은 "안기부"나 "중앙정보부"의 폭압적인 분위기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에겐,

 

이런 류의 "평화(?)"스럽고 "비폭력"스러운 이야기는

다소 맥빠지는 이야기일 수 있겠다. 

 

드라마틱한 전개와 기상천외한 사건들에

우리 모두 너무 익숙해져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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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

 

그의 전작들이 한결같이 보여준 것처럼,

잔잔하고 소소한 이야기들 속에

많은 진주들이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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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를 지칭하는 영문명이

"조선"이 아니라 "고려 Korea"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우리 민족 공동체의 정체성의 많은 부분이

고려에서 기원한다는 점은 그리 이상한 것이 아니다. 

 

반면,

나에게 고려사는 그리 친숙한 역사가 아니라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

디테일은 말할 것도 없고,

고려의 임금들을 열거하라 해도 전혀 할 수 없는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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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면에서

조선의 정반대, 대척점에 서있는 고려.

 

그 고려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실리성과 역동성과 개방성을

담아내기 위해서 애쓴 책이다. 

 

상식적으로 공유되고 있는 

많은 고려사의 단면들을

"좀 더 다른 시각"에서 보자는 어프로치가

기저에 깔려있다. 

 

그러면서도,

전반적이고 일반적인 고려사를

큰 틀에서 잘 전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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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에 대한 광범위한 이야기들이 엮여있는 책.

 

500페이지를 넘어가는 두툼한 분량이 허투루 채워져있지 않고,

달콤하고 단단한 과육으로 속이 꽉 찬 튼실한 과실처럼

알찬 이야기로 가득하다. 

 

총 12개의 쳅터를 통해서

저자는

자폐를 둘러싸고 있는 형형색색의 이야기들을

재미나게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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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업적과 "특이한" 성격으로

근대 문명사/문화사에 이름을 남긴 몇몇의 위인들을

자폐와 연결해서 설명하는 것으로 책은 시작되고,

뒤이어,

자폐에 대한 연구의 역사가 펼쳐진다. 

 

누가 어디에서 어떤 과정을 겪어가면서

자폐라는 현상을 인식하고, 진단하고, 연구했는지가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미국의 Kanner, 유럽의 Asperger 뿐만 아니라,

20세기의 많은 연구가들이 거론된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책 한 권은 족히 만들어지겠다. 

 

자폐라는 것인 '발견'되고, 분석되고 대응되는 긴 과정은 결국

자폐가 하나의 병 혹은 증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넓은 범위의 스펙트럼을 포괄하는 개념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즉, 자폐라는 명칭이 담아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쉽게 정형화 하여 생각하는 "자폐의 이미지" 보다

훨씬 더 넓은 다양한 모습들을 담아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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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뛰어난 글솜씨를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다른 부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의학사/연구사 부분에서 조차도,

글쓴이는 적절한 긴장감과 재미를

딱 적절하다 싶은 수준으로 잘 버무려서

글을 끌고 간다. 

 

재료의 품질도 뛰어나고,

양념의 비율과 배합도 굉장한데,

인테리어와 플레이팅도 감성 충만한 식당 같다고나 할까.

 

읽는 이의 시선을 잡았다가 놓았다가, 당겼다가 풀어줬다가 하는 수준이

굉장한 능숙도를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읽는 재미가 가득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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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계속되는 부분은

자폐의 과학/의학적 측면을 넘어서서, 사회적 측면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사실, 자폐 연구의 역사는 단순한 지적 호기심의 충족이라는 측면이 강하다.

반면, 이 책이 진심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환자의 가족들과 환자 본인이 사회 속에서 겪어야 하는 불편과 좌절과 편견에 대한 것일 터.

 

환자의 부모들이 어떻게 네트워크를 만들어 가는지,

그리고 그런 네트워크들이 실질적인 삶 속의 변화를 도모하기 위해서

어떤 영웅적인 활동을 이어왔는지를 잘 그려내고 있다. 

 

물론, 그를 통해서

서구 사회의 전반적인 인식과 구조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우리는 엿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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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궁극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뇌신경학적 다양성"이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과 사회의 시스템이

"자폐 스펙트럼"을 "병"이나 "질환"이 아니라,

다양성의 측면에서 인식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각기 다른 피부색의 사람들이 있고,

오른손잡이와 왼손잡이가 있듯이,

우리의 "뇌신경학적 세팅" 또한 매우 넓은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검은 피부의 사람들을 비정상으로 규정하지 않는 것처럼,

왼손 잡이를 질환으로 규정하지 않는 것처럼,

그리고 다양한 성적 취향과 정체성을 "제거되어야 할 것"으로 규정하여 치료하려 들지 않듯이

 

자폐적 성향의 뇌신경학적 세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그러한 특성이 그 자체로

다양성의 측면에서 인정받고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겠다. 

 

어떻게 자폐를 고칠 수 있을까가 아니라,

자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자폐적 성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사회의 일원으로 생산적으로 기능하면서

독립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을지를

우리 모두가 고민하면서 풀어가야 하겠다는 방향이다. 

 

특히, 교육 제도와 고용/복지의 영역에서 이러한 인식과 시스템의 변화가

근본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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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후반 레인맨의 열풍과 그로 인한 대대적인 인식의 향상

그리고 그 이후에 전 세계가 목격한 폭발적인 자폐의 "증가(?)"는 

결국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되는데,

 

그로 인해서 자폐라는 것을 둘러싼 가장 열띤 논쟁은

긍정적이지 않은 부분으로 흘러가게 된다. 

 

자폐의 원인을 찾으려는 연구가 

엉뚱하게 도착한 지점은

불행하게도 "백신"이 자폐를 일으킨다는 잘못된 가설.

 

그리고, 그 결과로

서구 사회에서 대대적인 "백신 거부 운동"이 벌어졌다는 점을

우리는 눈여겨 보게 된다. 

 

저자는 이런 소모적 논쟁의 방향성이

결국

자폐를 안고서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을 위한

실질적인 사회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그 "기회비용"으로 삼았다고 안타까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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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ph Blenkinsopp 교수의 동료와 제자들이

그의 학문적 성과와 업적을 기리며 엮은 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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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기-에스라-느헤미야에 대한 논문 다섯 편,

지혜문학과 소위 "문서들"과 관련된 논문 다섯 편,

초기 유대교 형성 환경에 대한 논문 세 편,

신명기적 역사서와 선지서에 대한 구약신학 논문 네 편.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나에겐 다소 낯선 분야고,

공부의 양도 거의 쌓여있지 않은 미지의 분야라서,

깊은 공부보다는 거의 겉핥기에 가까운 태도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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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배치된 8편의 논문은

지혜문학과 문서들에 대한 언어적 접근이 깔려있는지라,

내가 무지한 분야인 관계로 읽기가 힘들어서

굉장히 재미가 없었지만,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은 

흥미를 자극하는 재미난 논문들이 실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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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열왕기와는 전혀 다른 방향성을 보이고 있는

역대하 20장의 여호사밧 왕의 전쟁 기사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Philip Davies의 논문은

지금까지 한 번도 공부해 본적이 없는

역대기에대한 성서신학적 접근을 재미난 예를 통해서 소개하는 느낌으로 읽었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별개의 책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한 편의 문서로 파악함이 온당한가를 논하는

James VanderKam의 논문도 흥미롭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대한 학자들의 대체로 일치하는 견해는

두 인물이 "동시대"에 활약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텍스트에서 발견되는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동시출현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며,

그런 텍스트의 올바른 독해법은 무엇인가를 논하는 것이

Judson Shaver의 논문이다. 

 

그런 동시대적 배치가 역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 말해주는 바를

제대로 잡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Robert Carroll은 느헤미야 6.14에 등장하는 여선지자 "노아댜"에 대한 글인데,

지금껏 그렇게 성경을 읽으면서 단 한 번도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던 인물인지라

구약 텍스트에 대한 나의 접근이 얼마나 일천한지를 깨닫게 해주는 논문이다.

 

이 논문은 다양한 "선지자"들의 출현과 역학 관계 속에서

바벨론 유수기 이후의 유대인 공동체의 권력관계와 이데올로기 체계를 읽어낼 수 있는 

중요한 열쇠중 하나를 제공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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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재미 없게 계속되는 글이 Part IV에서 재미있어 지는데,

그 중 최고의 재미는

에스겔 28.14의 텍스트를 기존의 다수설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하는 James Barr의 글이다. 

 

그는 "나는 그룹을 보내어, 너를 지키게 하였다"라는 다수설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너는 그룹이다"라는 해석을 그 대안으로 제시하는데,

대부분의 역본이 전치사[with]로 해석한 부분을

2인칭 남성 단수 주격으로 보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런 출발점은 결국

에스겔서가 창조설화를 어떻게 소화하고 해석하는지를 보여주는 관문이 되는데,

이를 통해 2성전기 유대교가 창세기 전반부를 이해하는 방식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굉장한 흥분이 느껴지는 글이고, 빠져들게 만드는 글이다. 

 

마지막 논문은 Niels Peter Lemche가 쓴 "the God of Hosea"라는 글.

 

그는 

호세아를 BC 8세기의 저작으로 보지 않고, BC 6~5세기의 저작으로 파악하는 것으로

그의 논의의 출발점을 삼는다. 

 

호세아에서는

바알적 요소를 야훼에 대한 묘사/서술에 이용하는 구절들이 종종 등장하는데,

Lemche는 이런 부분들을 유일신관의 발달단계와 연결지어서 설명한다. 

즉, 유일신 개념의 미분화라는 배경이 바로 호세아의 신학적 배경이라는 것이다. 

 

2성전기라는 시대적 배경과

유일신 개념의 미분화라는 두 개념어의 결합은

엄청나게 흥미로운 조합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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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좀 옳게 해서 구약신학 부분들도 열심히 읽어야 하는데,

공부가 부족하다보니, 읽을 수 있는 책들의 범위도 한정되고,

실제로 읽어내는 수준도 떨어진다는 현실을 보면서,

논문들을 읽는 내내 많은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국영수 공부 탄탄히 해둬야,

대학에서 본격 다루게되는 자신의 전공분야게 깊이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역시 성서신학을 제대로 다루려면,

그 기반에 언어공부가 탄탄히 다져져 있어야 하는데,

중요한 학습의 시기를 게으름과 딴짓으로 날려버렸으니...

만시지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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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들어서 하루가 다르게 커지고 있는

"전문가의 전문 지식에 대한 대중의 무시와 경멸"

그리고 그와 궤를 같이 하는 필연적인 결과로 등장하는

갈수록 심해지는 "대중의 극단적인 무식"과

그런 상태에 대한 "용감한 자신감"을 다루고 있는 책.

 

학문적인 접근보다는

무겁지 않게 평이한 언어의 에세이 형식으로 쓰여진 책이다. 
술술 잘 읽힌다.

 

미국의 평범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놀라울 정도의 "무식"을 생각해보자면,

저자가 왜 이런 책까지 쓰게 되었는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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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크게 접근하는 방향은
   # 대학의 퇴행
   #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역작용
   # 언론의 실패
   # 전문가 집단의 비도덕성과 책임회피
등이다.

이런 방향성을 가지고
저자는 개탄스러운 현대의 "무식한 대중"이
보여주는 "전문지식에 대한 무시"를
설명하고 대안적 방향을 제시하려고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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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스템이 학문하는 곳에서
"등록금을 내는 소비자"를 상대로 서비스를 판매하는 곳으로
퇴행하고 있는 현실

언론의 구성원들이
전문인으로서의 역할을 전혀 수행하지 못하고
지식의 보급과 확산에 도리어 방해자가 되고 있는 모습

정보혁명이 사람들에게 심어주는 헛된 망상

등등의 지적은
비단 미국 사회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너무 잘 적용되는 지적이다.

@

나도 수 십 년간 지속해오면서 나름 전문적인 지식을 구축해온 두 영역이 있다.

 

평범한 사람들이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전문 영역의 지식"에 대해서 보여주는

가벼운 평가와 용감한 간섭과 과감한 훈수들을 보면서 느껴온 바가

정말로 구구절절히 많이 쌓였기에,

이 책을 읽으면서 상당한 공감 속에서 매 페이지를 넘겼다. 

 

물론, 나도 어떤 이름 모를 전문가에게

그런 좌절적 감정을 심어줄 때도 많겠지.

@

그리 길지 않은 책인데,

여러 책을 동시에 끌고간 덕에

열흘이 넘게 걸렸다. 

 

다양하게 등장하는 고유명사 또한

빠른 진행을 더디게 만들었다. 

 

남의 나라 역사에 빠져 20년을 넘게 지내면서

정작 내 나라의 역사에는 무식한 사람이 되었느니,

앞으로 긴 시간을 들여서라도

우리 역사에 대한 대강을 세워야하겠다. 

 

@

려말선초를

정도전의 시각에서 서술해 놓았다. 

 

조선의 건국 과정과,

왕자의 난을 거쳐 태종이 제위하여

강력한 왕권을 셋업하기까지의 혼란기 속에서,

이방원의 대척점에 서 있는 정도전을

진정한 민본 개혁의 주창자로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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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앞에 읽은 이윤섭의 "여말선초"가

그 시기의 국제적 역학 관계에 대한 

깊은 이해를 기반으로 해서,

그를 통해 고려와 조선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고 있는 반면,

 

이 책은 한반도 내부의 보수-개혁파의 역학관계를 중점에 두고,

서술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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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가 "조유식"이라는 것은 

굉장히 흥미로운 부분이다. 

 

이 유명한 사업가가 살아온 길이

이 책에 잘 녹아 있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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